박미정 "A scene" 2013. 3. 20- 3. 31


사건의 잠재적 폭력성 무산(無産)시키기

-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회화가 세상을 문제삼는 방식
박미정의 세계는 빠르면서도 사물의 특성을 포기하지 않는 고유한 붓 터치에 의해 성격화된다. 붓질의 흐름은 대상을 간과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오히려 포용해낸다. 그것은 예컨대 정교하고 사전에 꼼꼼하게 계산되는 방식과는 크게 구분된다. 그렇다고 앵포르멜이나 신표현주의가 그렇게 하곤 했던 것 같은, 어떤 격앙된 태도의 산물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당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자. 작가의 기법은 도구적 차원을 넘어선다. 기법은 기능이나 기술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의 세계 자체다. 화가의 붓질은 그것 이상의 것에 의해 성립되고, 그것 이상의 것을 전달한다. 이런 맥락에서 붓질의 느림이나 빠름은 정확하게 그렇지 않으면 안 될, 사유와 대상을 매개하는, 또는 대상(세계)을 사유의 내부에 기입하는 고유한 방식이다. 안료의 양과 농도, 표면과의 마찰, 대상과의 상응성의 동시적이고도 내밀한 조율을 안에서 대상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고도의 비평적 해석행위인 것이다. 보이는 대상 너머의 대상, 시각적으로 인식되는 세계의 이면에서 돌아가는 지각되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는 형태나 구성, 스케치나 채색의 과정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회화가 대상을 포용하고, 세계를 문제삼는 방식은 그런 이성적인 조형행위보다 더 잠재적인 수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박미정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붓의 터치와 흐름은 상징적인 이미지들 이상으로 작가의 심리적 특성을 반영한다. 격한 분출, 정교한 실행, 서술적 기능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때로는 다만 재빠른 치달음과 맥락없는 머뭇거림 사이를 오가는 듯한 그것들에서, 우리는 오로지 한 인간존재의 내부로부터만 도래해서 존재 보편으로 조용히 확장하는 하나의 의미있는 존재론과 마주할 수 있다. 다소 유동하는 모호한 온건함, 의도적으로 흐트러뜨려진 사물의 윤곽, 소박한 대비, 고백의 조심스러운 뉘앙스, 양보적인 구성, 외침보다는 웅얼거림으로 기우는 묘사, 호소나 읍소(泣訴)보다는 느긋한 침묵에 더 가까운 붓질들….
이러한 특성은 이미지를 구성하고, 서사로 나아가는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주요하다. 2011년 작인 <불편한 침입>이 그 예로서 언급될 만하다. 여기서는 최소의 잉여공간도 남기지 않은 채 사방의 벽체에 의해 에워싸여 있는, 거의 끼어있다시피 한 침대가 세계의 전부다. 원근법적으로 소실되는 푸른 벽체의 정연한 세로줄무늬와 어지럽게 헝클어진 흰색의 침대보는 이 세계를 중립적인 공간이나 장소(place), 또는 영역(zone)을 넘어서는 하나의 경험이나 사건과 결부된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시선은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구겨지고 주름진 침대로 집중된다. 하지만 그것이 다다. 그 다음으론 배경과 사물, 사물과 사건의 구분조차 모호하다.
침대 위의 뒤집혀진 채인 검은색의 우산은 더더욱 그렇다. 침대의 의미 범주는 해석을 교란하며 광범위하게 퍼져나갈 수 있다. 이미 그것은 때로 열대의 식물들이 우거진 군락지로 화하기도 했고, 얼룩말들이 뛰노는 초원(2006)과 중첩되기도 했다. 우산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불편한 침입>과 같은 해에 그려진 <수영장의 우산>이나 <거대한 우산>에서도 화면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사물은 오롯이 검정색의 우산이다. 작가의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 수수께끼 같은 사물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된다. 박미정의 사물들은 분명 사건들로 향하는 관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섰을 때, 정작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사물과 경험의 새로운 요새
<불편한 침입>에서 보듯, 박미정의 사건들은 존재와 부재의 사이에 위치한다. 사건의 발단과 전개, 결말의 어느 것 하나도 밝혀지지 않는다. 사물들은 아직 사건에 편입되지 않았고, 경험들에 서사의 규범, 곧 문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사물들은 문법화되기에는 너무 사물 자체며, 사물 자체로 있기에는 이미 사건과 결부된 어떤 개념적인 사이의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왜 작가는 사물들을 사건화, 문법화함으로써, 하나의 사건이나 완료된 서사로 나아가지 않는 것인가? 왜 기술하거나 묘사하고, 나열하거나 강조함으로써 이해를 보강하는, 통상적인 소통의 경로를 밟아나가지 않는 것인가? 그 답은 사건화, 문법화의 과정이 곧 필연적인 왜곡과 변형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사건화는 정작 사물의 경험과 무관한 타자들에 동의는 것이고, 서사화는 합리화하고, 검열하고, 첨삭하고, 조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물 자체를 추방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당화, 합리화, 검열과 첨삭의 과정이 개시되는 순간, 사물과 경험의 원초적 차원은 탈해석적 불명료함과 탈권력적인 모호함은 명백하게 기승전결을 갖추라는 집요한 요구에 노출된다. 사물들은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이분법의 탈이라도 쓴 것처럼’ 서로에게로부터 멀어지고, 상호성마저 박탈당한 채, 다만 각자의 인위적으로 각성된 서사의 창백한 요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는 사물 자체, 또는 순수하게 경험된 사물들을 거짓 서사가 허용하는 인위적인 분할들 안으로 격리시키고, 서로를 넘나들었던 활력을 폐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박미정이 말한 ‘시각의 이동’, 즉 ‘세상이 하나의 물질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사적 영역의 안과 밖이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 또한 즉각 부인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박미정은 사물을 사건화하거나, 문법을 동원하는 완료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 대신 사물과 사물의 경험을 그렇게 진행되기 이전의 어떤 지점에서, 사건화가 진행될 수 없는 탈연대기적 시간대로 빼돌리는 것이다. 사건과 서사의 경화증이 초래될 수 없는 차원, 서사의 합리적인 기승전결을 기대할 수 없는 지대에 사물과 경험의 요새를 꾸리는 것이다. 어떤 약속도 하지 않고, 어떤 미래도 담보하지 않으면서 다만 사물로서 존재하도록 허용되는 곳, 서사에 중독되거나 해석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상품화된 사건의 소비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 절망적인 결전을 치루지 않아도 되는 곳!

사건의 잠재적 폭력성 무산(無産)시키기
<불편한 침입>으로 돌아오자. 여기서도 벽체와 침대의 청색과 흰색, 수직 띠와 헝클어진 침대보는 하나의 명료한 사건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시각적 대비에도 불구하고, 사물과 배경의 양자대응은 성취하지 않는다. 사건은 존재와 부재의 어느 한 쪽에 결정적으로 속하지 않고, 맥락은 불구화되며 따라서 사물들의 발화는 침묵에서 멀리가지 못한다. 구겨진 침대보는 있었던 사건의 기억일 수도 있지만, 사건의 현재적 부재에 대한 표상일 수도 있다. 또는 일어날 일에 대한 심리적이고 암시적인 표상일 수도 있다. 일테면 이 세계는 사건과 사건의 부재 사이에 자리잡고, 대상과 심상 사이에 위치되며, 회고적 시간과 예고적 시간의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사건과의 연계를 내포하지 않은 중성적 시간, 예컨대 과거, 미래, 현재로 구분되고 표기되는 그런 시간대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세계다. 이렇듯 박미정의 회화에는 경험되었던 사물의 기억과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초사물의 모습이 모호하게 드리워져 있다. 사건 이전의 사물들, 명시화할 수 없는 경험, 시침과 초침으로 기록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취급 메뉴얼, 그것이 박미정의 회화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박미정은 사물과 원초적 경험을 이러한 시간대로 이전시킴으로써, 중성적인 시간대 안에서 매도당해 온 의미들을 복권(復權)시킨다. 이 시간적 전이가 “매순간 변화하는 사물적 표피적 가치가 아니라, 그 사물의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본질”에 천착하는 작가만의 고유한 방식인 것이다.
사실 모든 사물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전쟁터다. 모든 사물의 내부에서 의미들 간의 격돌이 야기되고, 기호들 간의 전쟁이 발발하는 보습을 보라! 작가란 진정한 해방(解放)의 순간을 염두에 두면서, 그것들 가운데 가장 지배적이며 권력을 수행하는 의미와 기꺼이 맞서는 사람이다. 사물과 사물들의 보이지 않는 외침을 듣기 위해 보이는 이미지, 낯익은 설정과 친밀한 관계를 전복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억압된 감각을 되돌리고, 망실되어가는 가치를 되살리는 대열에 가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침대와 우산, 담요와 식탁, 숲과 수영장을 거쳐 사건화된 경험 너머로 역행하는 박미정의 행보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사건화된 경험-에 배어있는 피상성을 드러내고 잠재된 폭력을 무산시켜나가는 과정 말이다. 지금 박미정의 회화들이 개진하는 작고 소박한 저항은 화가와 시인이 오랜 전통의 맥락에서 볼 때 전혀 낯설지 않다.

박 미 정 Park, MI JUNG
1999-2003 홍익대학교 회화과
2003-2007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ACTIVITIES
2012 개인전,MIND SCENERY- RED, Space A,청주,충청북도
초대전,“심리적 풍경”, New Space Art Gellery, Hue, 베트남
공감,UM Gallery, 서울
2011 Local Wave 2011 ,아트팩토리, 헤이리 경기도
EXIT, 우민아트센터,청주, 충청북도
Unfamiliar, 신미술관, 청주, 충청북도
2008 樂/JOY ,Pax Arts Asia, 베이징, 중국
개인전, 스페이스함,서울
2006 千態萬象/ Diversity in Form& Thought, Art Gallery of Imperial City, 베이징,중국
2006 석사학위청구전, 토포하우스, 서울

RESIDENCY
2012 Hive Camp Residency,청주,충청북도
2011 공감 창작 스튜디오 residency, 청원군, 충청북도

AWARD
2012 제 1회 충청현대신진예술인 선정